“못 가요. 여긴 보호구역이라 아무나 올라갈 수 없어요. 굉장히 위험하거든요.”
의외다. 서울말씨를 구사하는 당차고 똘똘한 녀석이었다.
“잠깐만 구경하고 가면 안될까?”
아무리 사정해도 단호하다. 그렇다면 비장의 무기를 쓸 수밖에.
“그럼 어른 나오시라고 해!”
잠시 후 녀석이 모시고 나온 할머니께 그곳에 가고 싶은 이유를 설명했더니 물을 가두어 둔 수원지라 볼 게 없지만 그래도 가고 싶다면 조심해 다녀오라는 허락이 떨어졌다. 차를 세우고 저수지 둑을 향해 앞서 걷던 녀석은 걷는 게 아니라 날아가는 듯했다.
“에이. 그것도 못 걸어요? 빨리 좀 와요.”
나는 비로소 하늘 가까운 별천지 외딴집에 사는 그가 황우성이라는 이름을 가진 6살 어린 천사라는 걸 알게 되었다.
항도 수원지 둑에서 막대기로 무술 시범을 보이고 있는 어린 천사 황우성 | |
우성이에게-
강아지 이름이 ‘사랑이’라고 했니?
그 높은 곳이 수원지인 줄도 모르고 나는 그냥 높은 곳에 대한 호기심이 발동해 무작정 올라갔었다. 네가 가파르기가 만만치 않은 그 둑으로 안내했을 땐 세상에 이런 곳도 있구나 싶었다. 고요하고 아늑한 그곳에 네가 살다니! 사실 그건 생각지도 못했던 풍경이었다. 내가 힘들다고 지팡이 대신 빌려준 막대기는 아주 유용했다. 그런데 할머니 댁에 사는 너는 뭐 그렇게 아는 게 많은지, 너와 수원지 그 높은 둑을 숨차게 팔을 휘저으며 달려갔을 때 내가 무슨 생각을 했는지 아니? 너는 천사였다. 한순간도 쉬지 않고 종알대던 네 목소리는 하늘을 찌를 듯 맑았고 부푸러기처럼 가벼웠다. 그런데 너는 알고 싶은 게 무어 그리 많아 질문을 하고 또 했을까? 내가 답을 끝내기도 전에 너는 다른 질문을 던지고 또 하나의 답을 마련할 때면 어김없이 또 다른 질문이 이어지고. 하여 생각을 바꾸기로 했다. 네 질문을 답하기에 앞서 내가 먼저 질문을 던지는 것. 그런데 너는 내게 질문할 때 못지 않게 답 또한 명확하고 분명했다. 나는 항도 수원지, 하늘 가까운 외딴집에서 아주 유능한 가이드 한 사람을 만난 것이 믿기지 않았다. 물을 가둔 수원지에서 산 정상은 아주 가까웠고 바다는 저 밑 발 아래에서 큰 짐승처럼 꿈틀거렸다.
필자와 우성이가 벌인 한판 대결 | |
어린 武士(무사)
알고 보니 너는 아주 멋진 武士였다. 그 많은 무술의 동작은 어디서 익혔을까? 내게 준 막대기는 처음 만난 나와 무술 대련을 해보고 싶은 의도가 있었음을 나중에야 알았지만 아쉽게도 대련의 결과는 어린 무사의 승리로 끝났고 져도 마음 상하지 않은 기분을 뭐라고 설명할 수 있을지, 수원지에 무지 많은 참게가 살고 잉어가 있다는 말을 믿어야할지 고민하지는 않았다. 이제 그만 내려가자고 했을 때 너는 내 말을 가로막으며 설명이 끝나지 않았다고 했다. 그리고 가파르고 위험한 길을 단숨에 뛰어내려와 네 친구들, 세 마리의 크고 작은 개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어디 그뿐이니? 물이 고인 웅덩이와 무술을 연습하던 넓적 바위와 유격훈련으로 뛰어내린다는 큰바위 등을 소개하느라 바빴다. 그리고 은근히 눈치를 살피며 무슨 말을 할 때마다 너는 내 말을 가로막기에 분주했다. 그리고 얼마의 시간이 흘렀을까. 나는 단호하게 자리를 일어서지 않으면 안되었다.
그렇게 함께 놀아주기를 바라던 너를 두고 돌아서려니 문득 소중한 친구를 잃은 기분이었다. 네 말을 가로막고 내가 가야한다고 했을 때 너는 뭐랬니?
“그럼 내일 또 올거죠?”
“안돼, 내일은. 올 수가 없어”
“그럼 두 밤만 자고 와요. 알았죠?”
“아니 그것도 좀 어려워. 나는 아주 먼 곳에 살거든”
너는 인정하고 싶지 않은 듯 “그럼 모레는 꼭 오세요. 기다릴게요 알았죠. 네, 네? “
아쉬움에 카메라를 꺼냈을 때 너는 흔쾌히 승낙했다. 그리고 들고 있던 막대기로 멋진 소림사 무술의 포즈를 잡고 곁에 서주었다. 그리고 나서
“아니요, 잠깐만요, 이거 바꿔도 되죠?”
그리고 다시 네 친구 ‘사랑이’를 안고 얌전히 내 곁에 다가섰다. 막대기보다는 사랑이가 우선이었으리라. 너를 한번 안아주고 차에 올랐을 때 끝까지 포기하지 못했던 말 기억하니?
“두 밤 자고 꼭 오세요. 알았죠, 네?”
안절부절 못하던 네가 다시 한번 더 “잠깐만!”을 외치며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바닥에 있는 푸른 쑥 이파리 하나를 뜯어 내 손에 꼭 쥐어주며 뭐랬지?
“이거 쑥인 거 알죠? 가서 잘 키워서 맛있게 쑥국 끓여 드세요. 알았죠?”
그 기막힌 것을 선물할 생각을 너는 어떻게 했던 것일까? 고백하지만 이렇게 귀한 선물을 받아보기는 내 생전 처음이다. 마지막까지 자꾸만 “알았죠?”로 다짐하던 네 말에 나는 그만 눈물을 쏟을 뻔했다. 모든 일정 다 팽개치고 한나절이라도 함께 놀아주었으면 우린 정말 좋은 친구가 되었을 텐데 바쁘다는 이유로 손을 흔들고 돌아서는 마음이 왜 그렇게 허전하고 아쉽던지. 지금쯤 너는 남해가 보이는 그곳에서 푸른 하늘을 안고 수원지 넓은 둑을 뛰고 구르며 사랑이와 함께 천지 가득한 풀잎과 새소리와 물고기들과 놀고 있겠구나. 두 밤 자고 놀러 못 가서 정말 미안하다. 그러나 언젠가는 함께 찍은 사진과 작은 선물 꾸러미를 들고 항도 수원지를 찾아갈 것이다. 천사야, 그때까지 꿈을 접지말고 건강하게 기다려주겠니?
어린 무사, 우성이는 지난 해 초등학교에 입학을 했고 나는 우성이와의 우정을 지금도 지켜가고 있다. 남해, 작은 포구 항도에 가면 우성이를 만날 수 있다는 기쁨으로 언제나 나는 설렌다. 우성이는 남해의 자연을 닮은 나의 소중한 친구다.
/김인자(시인·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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