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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일애국지사 고 최용덕 선생의 빈소에 마련된 영정. | |
학도병 탈출, 광복군으로 가 항일운동 벌여
12일 타계, 14일 국립대전현충원 안장
남해의 항일독립 애국지사 스물네 분 중에 유일하게 생존해 계시던 최용덕 선생이 지난 12일 오전 9시15분 삼동면 영지리 고잔마을 자택에서 별세했다.
농사를 지으며 여든이 될 때까지 건강을 지켜오던 고인은 지난 2000년 4월께 찾아온 뇌졸중 증세로 인해 그 때부터는 거동이 자유롭지 못했다. 병석에 누운 지 4년여. 지난해 태풍 '매미'가 덮쳤을 때는 집이 물에 잠기는 바람에 목숨을 잃을 뻔한 일도 있었다. 다행히 병원용 침대 매트리스가 물위로 떠오른 덕에 부인 임연옥(80) 여사와 함께 가까스로 위기를 넘겼지만 그 때의 충격이 노환을 더욱 재촉했는지 선생께서는 갑신년 정월을 넘기지 못하셨다.
마지막 애국지사 최용덕
선생의 빈소는 남해전문장례식장에 차려졌으며, 빈소에는 고인의 죽음을 애도하는 많은 조문객들의 발길이 이어졌다. 선생의 장지가 국립대전현충원으로 정해지고 거기에는 오전 11시까지 당도해야 함으로 남해에서의 발인제는 14일 새벽 5시에 시작됐다. 고향마을에 마지막 인사를 건네는 노제에는 많은 동민들이 나와 먼나먼 장지로 향하는 선생을 배웅했다. 유가족들과 선생을 실은 차가 남해대교를 건넌 것은 아침 7시가 조금 넘은 때였다.
국립대전현충원에 도착하자 훈련된 병사들이 통일되고 절도 있는 동작으로 선생을 영접했다. 광복회와 국립대전현충원이 주관한 선생의 장례식은 애국지사장으로 엄숙하게 거행됐다. 군악대의 장송곡 연주 속에 광복회원들과 대전현충원장의 추도사, 헌화, 조총발사 등 애국지사에 대한 국가의 예우는 엄숙하게 진행됐다. 태극기에 쌓인 선생은 애국지사 제3묘역에 안장됐다. 선생의 묘소에는 '애국지사 제70호 최용덕의 묘'라는 묘비가 세워졌다.
고 최용덕 애국지사의 삶
고 최용덕 애국지사의 항일운동은 지난해 말 김우영 선생이 펴낸 '남해군의 항일운동' 제5장 에 '최용덕과 7인 학도병 탈출사건' 편에 자세히 소개돼 있다. 선생은 1920년 5월 20일 삼동면 영지리 2532-2번지에서 아버지 익전, 어머니 배아지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선생은 배우겠다는 일념하나로 일본으로 밀항했다. 일본 중앙대학법학과에 재학 중이던 1944년 1월 20일, 선생은 다른 한국인 학생들과 마찬가지로 일제에 의해 학도병으로 강제징집 당한다. 선생은 중국 장쑤성(江蘇省) 쑤저우(蘇州)의 일본군 제46대대 제2중대에 배속받아 전선생활을 하던 중 다른 6인의 학도병들과 함께 치밀한 탈출계획을 세운 뒤 3월 10일 무장한 채로 탈출을 감행했다. 7인의 탈출병들은 탈출 후 중국 충의구국군에 도착하기까지 일본군 전선 분견대, 왕정위 정권 병사(兵舍)를 수 차례 습격하여 많은 전과를 올렸다. 당시 중국 현지 신문에 7인의 학도병 이야기가 크게 보도되었고 충의구국군은 이들을 열렬하게 환영했다.
7인의 학도병들은 그 후 광복군 제1지대 제2구대에 배속되어 당시 대한민국 임시정부 위정원 전의장 이강 선생, 정화암 선생, 광복군 징모 3분위 김문호 주임, 이소민 구대장등과 함께 계속 항일전에 참가했다. 선생은 광복 이듬해 귀국, 고향으로 돌아왔다.
선생은 공직에 나갈 기회도 여러 번 있었으나 나가지 않고 오로지 농사만을 지으며 평범한 농민으로 살아왔다. 선생은 1982년 대통령표창, 90년 건국훈장 애족장을 받았다.
유가족들
고 최용덕 애국지사는 부인 임연옥 여사 사이에 4남2여를 두었다. 영일(49년), 영우(50년), 영숙(53년), 영균(55년), 영대(58년), 영혜(61년생)씨가 그들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