젊은 날 나는 인생이란 게 따뜻한 봄볕이 드는 근사한 호텔의 창가에 갓 풀 먹인 하얀 식탁보가 깔려있고 거기에 “예약석” 이라고 쓰여 있어 나를 기다릴 줄 알았다.
살아가면서 겪는 수많은 도전과 응전 속에서 실패를 경험하고 벌써 나이가 이렇게 들었구나 할쯤에서야 혼돈이 밀려왔다.
“이미”와 “아직”이다. 흔히 우리는 이런 비유를 즐긴다.
목마른 사람이 길을 걷다가 귀한 물 한잔을 얻었다. 반쯤을 마신 후 남아있는 물 컵을 바라보면서 어떤 이는 벌써 반을 마셔버렸구나 하는 반면 또 어떤 이는 아직도 반이나 남아있구나 한다.
이미는 완성형이지만 아직은 가능성의 시대다.
가능성의 시대에서 우리는 꿈을 꾸고 변화를 시도한다. 어려움 속에서 장애를 극복하고 가능성을 향하여 훌륭한 삶을 살아갔던 사람들을 통해서 우리는 감동한다.
소아마비를 극복하고 32대 미국대통령이 되어 뉴딜정책을 펴서 강국의 기초를 다졌던 루즈벨트, 승마도중 낙마하여 척수장애를 입고도 수많은 장애인들의 희망이 되어 새로운 삶을 살아가고 있는 영화 슈퍼맨의 주인공 크리스토퍼 리브, 앞이 보이지 않으면서도 영혼의 소리를 통하여 흑인 팝음악을 탄생시킨 스티비 원드, 오체불만족으로 전 세계 사람들의 심금을 울렸던 오오타케 히로타다,
또한 장님인 헬렌켈러가 그랬고 언어장애를 가지고도 세계적 대문호가 된 헤르만 헤세가 그랬다.
이미 나에게 닥친 시련 앞에 굴복을 선언하기 보다는 아직은 내게 남은 가능성에 더 많은 가치를 두고 도전했던 인물들이다.
중요한 것은 사고의 전환이다. 아직 과 이미 사이에서 혼돈하면서도 아직의 가치를 발견하고 남아 있는 생의 긍정적 전환을 시도했기 때문에 우리를 감동시켰던 것이다.
1996년 미국 아틀랜타 올림픽 개막식 성화의 최종주자를 보면서 전 세계는 흥분하였다.
파킨슨병으로 인하여 재기 불능이었던 한 사나이가 사지를 벌벌 떨면서 천천히 성화대를 오르고 있었다.
1960년 로마올림픽의 복싱영웅 무하마드 알리, 영웅이면서도 흑인차별의 식당에 항거하여 금메달을 허드슨 강에 버릴 수 있었던 사람, 수차례의 세계 헤비급 챔피언으로 군림하면서 지구 역사상 가장 강자였던 그가 그의 인생에서 가장 초라한 모습으로 성화대를 오를 때 약자가 아니라 더욱 강인한 모습으로 우리에게 다가왔음을 볼 수 있었다.
무하마드 알리가 그랬다.
"내가 성화에 점화할 때 왜 울었죠? 나도 했는데 여러분은 왜 못합니까. 뭐든지 포기하지 마세요."
사고의 전환이다. 인생이란 아직 내게 남은 생이 있기 때문에 아름다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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