앵강만 형제도 사이에서 본 호구산

 

 걷는다는 것은 가두고 있던 나를 자연에 열어두는 일이다.  입은 닫되 귀를 여는 일이다.  소로를 따라 걷는 걸음에 행여 허황된 욕심이 붙어있지는 않은지, 몸이 마음을 앞지르지는 않은지, 불필요한 것에 매여 정말 소중한 것을 놓치고 있지는 않은 지를 되돌아보는 일이다.  그러나 산을 걷는다는것은 큰 가슴에 작은 나를 포개는 일이다. 나의 교만이 하늘의 두려움을 잊을 때쯤이면 뻣뻣해진 허리와 무릎꿇기를 산은 말 한마디 없이 조용히 내게 명령한다. 그러나 산을 내려오면 산은 자신도 모르게 몸을 낮추었다는 것을 비로소 알고 깨닫게 한다. 그래서 나는, 산을 품이 큰 스승으로 모실 수밖에 없다.
내가 좋아하는 산은 특별히 이름이 있어서 사람들이 많이 가는 산은 아니다. 매번 혼자 걸을 때가 많아서 산세가 험하거나 코스가 긴 구간은 피하고 허리가 약한 점을 감안해 카메라와 물병과 간단한 상비약 등 가벼운 준비물만을 갖추고 두 세 시간 걸을 수 있을 정도의 코스면 적당하다. 그러나 보통 사람에게 두 세 시간이라고 한다면 내 걸음으로는 서너 시간 혹은 네 다섯 시간이 될 수도 있다. 더러는 그렇게 해서 무슨 운동의 효과를 기대하겠느냐고 하지만 나는 운동을 목적으로 산을 가는 것이 아니라 산이 품고 있는 계곡이나 그 산을 이루고 있는 나무의 모양새나 향기나 혹은 수줍게 얼굴을 감추고 있는 소로나 툭 트인 능선의 후련함을 즐기기 위해 산에 가는 사람이다.
호구산은 앵강만에서 낚시를 할 때 정면에 있는 봉우리가 아주 푸근하게 느껴져서 언젠가는 한번 오르리라 맘먹고 있던 산이었다. 그러나 몇 번 용문사에 들르면서 오르고 싶은 유혹은 있었지만 시간을 낼 수가 없어서 미루어왔던 산이었다.
산은 역시 사람이 붐비지 않은 산이 좋다. 남해군은 모두 청정지역이라고는 하지만 그래도 금산이나 망운산이 시절을 따라 사람들의 발길이 잦은 산이라면 호구산은 차가 오를 수 있는 용문사까지만 사람의 왕래가 잦고 평일에는 거의 사람을 만날 수 없는 곳이다. 아무리 산이 좋아서 오른다 할지라도 잠시 경내 샘에서 물 한 모금 마실 겸 절에 들러 용문사 석불은 한번 더 보고 가는 게 좋겠다는 욕심은 접을 수가 없었다.  

용문사 석불은 1974년 경상남도유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고 한다. 석보살상으로 불상의 키는81㎝이며 약 300년 전 임진왜란이 끝난 뒤 용문사를 중건할 때 절 마당에서 발굴되었다는데 머리에는 보관을 쓰고 영락(瓔珞)과 팔찌를 걸고 있는 고려 초기에서 중기의 작품이다. 본래 돌로 되어 있으나 백회를 덧칠하여 원래의 모습이 많이 손상되었다. 얼굴은 사각형에 가까워 풍만을 보여주고 있으며 눈과 입은 작고 코는 큼직하다. 상체가 길고 무릎이 넓어 탄력성과 부피감이 풍부하게 느껴진다. 천의(天衣)는 두 가닥이 양어깨를 거쳐 팔을 감고 흘러내렸는데, 띠주름무늬가 단정하면서도 자연스럽다. 왼손은 배에 대고 오른손은 가슴을 향해 올렸다. 조각 수법이 세밀하고 장식이 화려하며 주홍녹자(朱紅綠紫), 금니(金泥) 등을 사용한 화려한 채색이 돋보인다.

  
 
  
용문사 입구의 샘 
  

나는 경사가 급하거나 험한 바위산보다는 숲 속 소로를 따라 걷는 야트막한 산을 좋아한다. 용문사가 끝나는 지점에서 시작되는 호구산은 역시 천년고찰답게 계곡을 따라 숲이 풍만하다. 아름드리 소나무와 측백나무, 벚나무, 단풍나무로 이어지는 구간을 천천히 걷다보니 따라오던 계곡의 물소리는 어느 틈에 도망가고 없다. 절을 지나 조금 오르니 백련암이 나오고 다시 조금 더 오르니 녹색 차밭이 있는 염불암이다. 차밭에 앉아 코를 흠흠 거리며 맡은 햇차 향기는 멀리서 물어오는 해풍에 섞여 미감을 자극시킨다. 암자에서 다시 우회전하니 대숲으로 반가운 길이 열려있다. 아무리 갈 길이 바쁘다 해도 잠시 걸음을 멈춘 채 눈을 감고 들으면 대숲에서 장난치는 바람소리가 청명하다.
대숲에 이는 바람소리를 들으며 정상까지 오르는 길은 별 무리가 없다. 콧노래를 부르다가 사방을 두리번거리며 쉬엄쉬엄 걷다보니 어느새 능선이다. 보통30~40분이면 오른다는 길을 나는 1시간이 걸려서 올라섰다. 조금 더 걸음을 더디게 해도 좋았을 걸 싶었다. 능선에 나있는 T자형 길에서 오른쪽으로 조금 더 가니 갑자기 사변이 훤해진다. 이게 호구산 정상이라는 건가? 예상했던 것보다 품이 넓은 공간이 나를 반긴다. 팔을 뻗어 심호흡을 하고 보니 앞쪽으로 올망졸망 그림 같은 섬들이 떠있다. 산에 올랐어도 저 넓은 바다를 다 품을 수 있을 듯 넉넉해진다. 大자로 누워 하늘을 본다. 구름이 느리게 흘러가고 있다. 눈앞에는 작가 김만중의 유배지 노도가 보이고 왼쪽으로는 금산이 오른쪽으로는 망운산 자락이 펼쳐져 있다. 아무도 없는 정상에서 한 30분쯤 쉬었을까? 신선이 부럽지 않았다. 내려갈 때는 다른 길을 택하고 싶었지만 어쩔 수 없이 갔던 길을 되돌아 하산할 수밖에 없다. 절 입구에 두고 온 차 때문이었다. 하산의 끝에는 앵강만, 그 아름다운 바다가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내려갈 땐 조금 더 느리게 게으름을 피며 걸어야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올라갈 때 놓친 풍경이 있다면 내려올 땐 조금 더 여유 만만하게 그것들 살피고 껴안아보리라는 생각에서였다.

배낭을 지고 저 높은 곳/오르는 이야말로 참 수행자임을/무거운 삶을 지고/산에 올라보면 알게 된다//필요 이상 힘이 들었거나/자신도 모르게 올라간 어깨를/아래로 내릴 수 있는 길은/배낭을 지고 한 걸음 한 걸음/하늘에 닿을 듯한 숨을 고르며/저 높은 산을 향해 오르는 일뿐이다//보라/오를 만큼 올라/하산의 끝에 선 이들/비로소 낮아진 어깨
-詩 <산에 오르며> 全文 -

/김인자(시인.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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