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문사 대웅전

 
  


걸음을 쉬어가게 하는 호구산 용문사
용소마을에 들면 키다리 수로와 서양다래농장의 구불거리는 길을 택하지 않고 곧바로 올라가 왼편 절 밑에 차를 세우고 보니 논 끝에 매달려 있는 마을 끝엔 온통 바다다. 평일이라 주차장은 역시 나 홀로 세상이다. 나는 그저 한가함이 좋아서 주차장 주변을 조금 걷다가 용문사를 향한다. 작은 연못을 왼편에 끼고 몇 걸음 오르니 숲은 금새 포근히 나를 반겨 안아준다. 숲에 몸을 맡기고 나니 심신은 거짓말처럼 편안해 진다. 걸음을 따라 물소리와 더불어 가지마다 이름 모를 새들이 까불지만 시끄럽지도 밉지도 않다. 연못을 오르니 바로 울창한 계곡이 기다리고 있다. 작은 매점을 지나 오른쪽 언덕에 9기의 부도가 있는 곳을 통과하면 곧 일주문이다. 일주문을 지나 대웅전까지 가는 길은 소란한 물소리가 옷자락을 붙잡는다.
용문사 입구에서 걸음을 쉬어가게 하는 것은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은 절 앞에 계곡을 가로질러 놓인 소박한 두 개의 다리다. 이 두 개의 다리는 울창한 숲과 어울려 짧지만 흔하게 접할 수 있는 모양새가 아니라서 나는 이 다리가 정겹고 좋다. 사람의 왕래가 뜸할 때면 이 다리에 앉아 계곡의 물소리들과 놀기도 하고 절에 들기 전 흐트러진 마음가짐을 잠시 다듬는 도량으로 삼기도 하는데 호구산으로 오르는 한적한 길을 버리고 그림 같은 작은 다리를 건너면 오른쪽으로는 절에 큰일이 있을 때 밥통으로 쓰거나, 쌀 씻는 통으로 혹은 설거지통으로 썼다는 큰 나무 밥통과 사철 물이 마르지 않은 샘이 있는데 이 어여쁜 샘의 물을 보고 그냥 지나칠 사람은 없을 것이다. 물 한 바가지를 마시고 계곡 쪽으로 이어지는 돌계단 양편엔 대나무 숲이 무성한데 계단 입구에서 위를 보는 풍경 또한 매우 정겹고 그럴 듯하다.

  
 
  
지붕마루가 서로 엇갈려 미적 감각을 더하는 용문사 
  



어떤 이는 절 입구에 세워진 사천왕상에는 다른 절과는 특별히 다른 모습을 연출하는데 그건 사천왕이 비리에 물든 선비를 발아래 깔고 있어 매우 해학적인 모습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 말을 들어서인지 나무로 깎아 세운 사천왕상을 보니 다른 절에 비해 무섭지도 않고 오히려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문사는 대웅전 건축양식이나 용문사석불 등도 중요하지만 고찰로써 주변의 숲이 볼만하다. 지난봄에 들렀을 땐 마침 절 마당의 늙은 매화나무가 꽃을 피우고 있었는데 차가운 마당에 철퍼덕 앉아 하늘을 보니, 매화는 하늘로 날을 듯한 대웅전 추녀 끝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서 아주 매혹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계곡의 물소리와 더불어 은은하게 퍼지는 노스님의 독경소리가 듣고 싶었으나 이번에도 독경은 들을 수 없었고 일주문 근처에는 지난 번 태풍으로 군데군데 무너진 석축과 바닥이 흉한 상처를 드러내고 있었다. 대웅전 왼편 마당에 새로 건축한 별채는 조금 물러나 지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었으나 그것은 호구산 자락을 건드리지 않는다는 뜻으로 받아들이기로 했다. 스님이 계셨으면 인사를 드리고 햇녹차 한잔 얻어 마시며 절 이야기라도 듣고 싶었지만 갈 때마다 절은 늘 비어있는 듯 적막감만 더했다.
절 입구에 있는 해우소의 삐걱대는 나무문을 열고 들어가 느긋하게 버릴 것을 버리는 동안 계곡을 급하게 내달리는 물소리와 새들의 지저귐과 대나무 숲의 합창을 들었다. 처음 안으로 들어설 땐 역한 냄새에 괴로웠으나 한참 그렇게 앉아있으니 냄새도 쭈그려 앉은 고통도 사라지고 없다. 일이 끝나고 해우소를 나오니 내 몸은 들어갈 때 비해 사뭇 가볍다. 버린다는 생각 없이 내 몸을 빠져나가고 없는 그것들, 내 몸이 미련 없이 그것들을 놓아버려서 비로소 버린 만큼 가벼워진 것일까?     

  
 
  
용문사 계곡과 절 사이에 놓인 다리 
  

호구산 용문사는…
1985년 경상남도 문화재로 지정된 용문사는 원래 신라시대에 원효가 창건한 보광사(普光寺)의 후신(後身)으로, 처음에는 천성각만 있었으나 1661년(현종 2년)에 신운이 채진당을 세웠고, 상운이 적묵당을 세웠다. 사세가 융성해지자 백월(白月)이 보광사보다 더 명당인 지금의 위치로 대웅전과 봉서루를 옮기고 용문사로 개칭하였다고 한다. 저승에 가서 사후세계를 잘 보내라고 비는 기도처이며, 임진왜란(壬辰倭亂) 때 불타 없어진 용문사를 백월(白月)이 이곳에 재건하고 그 뒤에 명부전을 세웠다고 전해진다. 명부전은 목조기와집으로 지장보살을 중앙에 모시고 명부(冥府)의 시왕[十王]을 좌우로 모시고 있다. 대웅전은 단층에 팔작지붕을 갖춘 목조기와집으로 규모는 정면 3칸, 측면 3칸이다. 1고주(高柱) 5량 구조의 다포집으로 기둥높이는 대체로 낮으며 약간의 배흘림이 있다. 활주가 4귀에 있는데 활주의 주춧돌은 4각이며 높이가 85㎝ 가량으로 조금 높다. 정면은 양 협칸에 비해 중앙 어칸이 넓고 각 칸마다 공간포(空間包)가 2구씩 놓여 있다. 포작(包作)은 외삼출목(外三出目) 내사출목(內四出目)으로 첨차 길이가 짧으며 첨차의 끝부분은 수직으로 잘려 있고 아랫부분은 교두형(翹頭形)이며 공안(工眼)은 없다. 살미첨차는 앙서형으로 처음은 가늘다가 끝부분으로 갈수록 넓어지며 45도로 잘려 있다. 천장은 계단 모양으로 점차 높아지다가 끝에는 수직으로 처리되고 나머지 가운데에는 우물반자로 되어 있다. 불단 뒤에는 고주를 세우고 그 사이에 탱화를 걸었고 윗부분에는 익공계의 장엄장식을 하였다. 처마는 겹처마로 이중 부연을 하였다.

/김인자(시인, 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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