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 앞 동네 이발소에는 이사한 이후로 쭉 다녔으니 10년도 넘게 다녔다.
이발사는 초등학교 후배인데 다방면으로 재주가 많은 사람이다.
다양한 취미도 가지고 있다. 여러 가지 새를 키우고 있어서, 항상 이발소에는 새소리로 넘쳐 난다. 또 이발소 한 구석에는 갖가지 열대어를 키우고 있다. 단순히 새나 물고기를 키워서 보고 즐기는 정도가 아니라 부화시켜서 분양도 하는 모양이다. 그런가하면 생활체육 배드민턴 동네 선수이고, 어시장에서 생선 파는 어부들의 모습만을 찍는 개성 있는 아마투어 사진작가이기도 하다.

 이런 다양한 취미와 재능이 있지만 놀이에 빠져서 자기 일을 소홀히 하는 사람은 전혀 아니라서, 이발소에는 예약손님이 항상 대기하고 있다. 하는 업이 이발뿐이 아니라서 점심때나 이발소 문을 닫은 후에는 부인이 운영하는 피자 가게 배달을 한다. 실한 사람이다.

 매월 1,2번씩은 이발하러 들리니까 제법 많이 만나는 셈이다. 만날 때 마다, 매사에 열심히 살아가는 모습이 느껴지는 믿음이 가는 사람이다. 말수는 그렇게 많지는 않지만 말을 시켜보면 조리 있게 조근 조근 이야기도 잘 한다. 그래서 이발하러 가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는 재미를 주는 사람이기도 하다. 대충 이발소 한담이란 것이 그렇듯이 서로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는 잘 없다. 그런데 얼만 전에 서로 다른 시각과 입장이 있어서 논쟁이 일어났다. 온 세상이 노 무현 대통령 조문 열기로 가득 차 있을 때였다. 언제나 그러하듯이 세상 돌아가는 이야기를 하기 위해 먼저 이발사에게 말문을 열었다. 
“ 동생은 분향소에 다녀왔는가?”
“ 네? 아, 노 대통령 분향소 말씀이에요?”
“ 그렇지, 이 지역에도 시민 분향소가 있다고 보도에 나왔데, 나는 남해에서 분향했네.”
“ 저는 안 갔다 왔습니다.”
“ 흠, 그래? 많이들 갔다 왔다고들 하던데...”
“ 좀 그렇지 않습니까? 대통령까지 했다는 사람이 자살을 한다는 것이.... 어쩐지 마음에 들지 않더라고요. 억울하다면 살아서 끝까지 결백을 밝혀 볼 일이 아닙니까?”
“ 그렇기도 하구먼.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는 도저히 자신의 결백을 밝힐 길이 없고 명예를 지킬 수 없다는 판단을 했을 수도 있지 않겠나?” 
 “ 이런 말들도 있던데요? 노 대통령이 조사를 더 받으면 엄청난 비리가 더 나올까 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고요.”
“ 그래? 그런 말을 하는 사람들이 있어? 허, 참.”
 나는 노 무현 대통령이 ‘집에서’ 돈을 받았다는 사실을 사달이 날 때까지 몰랐다고 생각하는 사람이다. 500만 명이 넘는 추모객들 역시 비슷할 것이다. 물론 이렇게 정반대의 생각을 하는 사람도 있을 수는 있겠다. 그러나 이미 고인이 된 사람에 대해 그렇게까지 악담 할 필요가 있는가 싶어서, 잠시 우울해져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눈만 감고 있고 이발사 역시 묵묵히 내 머리만 자르고 있었다. 한 참을 서로 침묵 속에 있는 것이 어색했던지, 이 선량한 이발사는 넌지시 말을 걸어 왔다.
“ 선생님, 마음이 상하셨어요? 저는 딱히 그런 뜻은 아니고, 누구나 너무 쉽게 세상을 버린다면 안 된다는 그런 말이었어요.”
“ 아니, 괜찮네. 민주주의 사회란 서로 다른 생각을 말 할 수 있는 사회가 아닌가? 자네가 괜히 내 듣기 좋아라고 마음에 없는 이야기를 하면 안 되지. 그럼 대화가 안 되니까.”
 그러고는 언제나와 같이 그 이발사가 면도를 하는 동안 짧은 단 잠에 빠졌다. 생각이 전혀 다른 사람이 새파랗게 날이 선 면도칼을 목에 대고 있음에도 말이다. 얼굴을 붉히며 논쟁을 하더라도 서로 간 넘어 서지 않는 금도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서로가 잘 알고 있다.
이것이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이다. 기초적인 ‘사람 사는 사회’인 것이다.  

 ‘서로 간 대화를 할 수 있다는 것’이 사람과 동물의 차이라고 흔히들 말을 한다( 실제론 동물들도 다양한 형태로 대화를 하고 있다.) 인간이란 다른 동물과 달리 소통이 능수능란하다는 말이다. 그런데 요즈음 소통에 있어서 참으로 ‘말’들이 많다. 터놓고 말을 못한다는 말이다. 소통이 안 되는 사회는 불행하다. 아니 비경제적이다. 상명하복으로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조직보다 토론을 통해 결론을 얻고 실행에 옮기는 조직이 더 경쟁력이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그래서 이윤 창출을 목표로 하는 기업들도 분임 토의니 전체 토론이니 같은 것들을 권장하고 심지어는 강요하기까지 하는 것이 아닌가. 다소 더디 가고 좀은 시끄럽더라도 소통을 통해야 효율성이 높다는 것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사회도 다양한 의견을 서로 피력하고 토론하고 논쟁하면서 살아가야 진정으로 사회가 나아가는 것이다. 한 쪽 날개만으로 날아다니는 새가 있던가?

  최근에 교사들의 시국 선언이 있었다. 보도에 의하면 교과부에서 서명을 주도한 교사들을 검찰에 고발할 예정이라고 한다. 우리 남해 지역에서도 여러 선생님들이 참여 했을 것이다. 교과부가 뜻을 굽히지 않으면 또 한바탕 징계 파동이 일어 날 것이 명백하다. 그러면 그야말로 아무 소득 없는 소모전만이 교육현장에 벌어 질 것이 뻔하다. 그럼 어떻게 이 예고된 사고를 피할 것인가? 합리적인 판단에 따라 처리하면 되는 것이다. 아주 간단한 방법으로는 과연 교사들의 시국선언을 한 행위를 놓고 법처리가 가능한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지난 12일 교과부 교원단체협력팀이 작성한 문건에서 ‘전교조의 서명운동은 헌법에서 보장한 의사표현의 자유범위 안에 있어 국가공무원법과 교원노조법을 위반했다고 보기 어렵다’고 결론을 내렸다고 한다. 교과부에서도 법률가들의 자문을 받아서 낸 결론일 것이다. 그렇다면 정답은 나와 있는 게 아닌가?
 오늘 문득 거울을 보니 머리가 또 자랐다. 이번 주말에 동네 이발소에 들려서 교사들의 시국 선언에 대한 서로의 견해에 관해 토론해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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