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산리 마을 입구의 오래된 느티나무. 지금은 폐교된 초등학교 분교가 보인다.
 

외국여행일 경우 한번 가본 곳을 다시 가지 않는다는 것은 여행을 시작하기 전에 내가 세운 일종의 원칙 같은 것이었다. 처음 집에 앉아 내가 가보지 못한 저 너머의 세상을 상상하는 일은 그야말로 꿈만 같아서 어디서 어떻게 시작해야 할지 막막했던 것도 사실이다. 그러나 조금씩 걸음마를 시작하면서부터 세상은 내가 갇혀 지내며 상상하던 것과는 다르게 무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가야할 곳과 가보고 싶은 곳이 너무나 많았다. 그것을 조금이라도 충족시키는 것 중 하나는 이미 갔다온 곳을 반복해 가지 않겠다는 원칙을 지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건 어디까지나 다른 나라일 경우에 해당되는 원칙일 뿐 우리나라는 다르다. 좁은 땅의 특수성을 감안하지 않더라도 같은 곳을 여러 번 가는 것은 여행을 여행답게 하는 매우 좋은 예이기 때문이다.   
가끔은 보이지 않은 누군가의 힘에 이끌려 뜻하지 않았던 길로 인도되는 것이 삶이라 한다면 내 삶에서 뜻하지 않은 것은 불현듯 새로운 길에 대한 끊임없는 유혹일 것이다. 나는 어느 때나 지도에 의지하는 여행을 그리 신뢰하지는 않는다. 그럴지라도 결국은 언제 어떤 방법으로 어떤 곳을 가고자하는 욕구가 일었다면 그건 이미 어떤 경로를 통해 그에 대한 정보를 갖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랬을까. 어느새 내 손에는 생각만으로도 가슴을 뛰게 하는 마음의 지도 한 장이 들려져 있었다. ‘남해’하면 청정해역이라는 수식어가 따라다니는 지명이기에 남쪽 바다에 대한 기대감은 오래 전부터 내 의식 속에 잠복해있었다.

 
 
북인도 마날리 근교의 아름드리 전나무 숲. 앞에 보이는 건물은 ‘히딤바사원(힌두사원).
 

어느 날 처음으로 찾아간 남해의 첫 숙박지는 편백자연휴양림 안에 있는 통나무집이었다. 바다 가운데 떠있는 섬 남해에서 편백자연휴양림이라는 단어가 주는 이끌림에 대해 넉넉한 상상을 하지 않을 수는 없었다. 몇 번이나 길을 물어 찾아간 삼동면 내산리 휴양림 안에 있는 통나무집들은 저마다 다른 이름(꼭두섬, 난초섬, 노도, 대초도, 돌섬, 떼섬, 모섬, 목도, 목리도, 미조도, 박도, 소초도, 소치도, 솔섬, 장구도, 조도, 추도, 콩섬, 팥섬, 형제도, 굴피나무, 비자나무, 유자나무, 후박나무)을 가지고 있었는데 자료를 뒤지거나 묻지 않아도 앞의 것들은 남해 주변의 크고 작은 섬 이름일 것이고 뒤의 것들은 남해군에 뿌리를 내리고 사는 나무이름일 것이다. 숲 속의 오두막이 바다에 떠 있는 섬 이름을 갖게 되다니! 결국 어디서나 자신이 선 자리에서 건너편을 보면 모두 섬일 수밖에 없는 세상 이치를 누군가 새삼 확인시켜 주려한 의도는 아니었을까?(참고로 내가 인상 깊게 본 숲은 독일, 뉴질랜드 남섬,  네팔 히말라야 정글지역에서 본 숲을 들 수 있겠으나 특히 마음을 끄는 것은 지난여름 본 북인도 지역에 고루 분포되어있는 하늘을 찌를 듯한 아름드리 전나무 숲이었다. 나는 인도가 가진 그 무엇도 부럽지 않았으나 오래된 숲만은 예외였다.)  
통나무집에 짐을 풀고 밖으로 나오니 곧게 뻗은 편백나무 사이로 손을 뻗는 햇살이 사랑스럽다. 산의 가슴께로 난 산책로를 걸으며보니 나무는 크게 두 가지다. 우선 ‘삼나무’라는 명패를 단 것이 보였는데 그러면 명패를 찾을 수 없는 나머지 한가지는 ‘편백나무’일까? 얼핏  보면 비슷하나 이들 나무는 삼각형의 원통구조로 곧게 뻗는 것이 특색인데 삼나무는 잎이 붉은 빛을 띠며 콩알만한 열매를 달고 이파리 또한 여러 층을 이룬 탓에 가지가 탐스러운 반면 편백나무의 전체적인 윤곽은 삼나무와 비슷하나 잎은 짙은 녹색을 띠고 이파리는 모양이 편편한 특색을 가지고 있다.(이건 식물도감을 이용해 얻은 지식이 아니라 내 마음이 나무들을 만나고 정의한 믿음에서 나온 말이다) 사실 나중에 남해를 두루 돌아보니 편백나무는 그곳에만 있는 게 아니라 남해군 전체에 고루 분포되어있는 아주 매력적인 나무였는데 내가 머물렀던 내산 자연휴양림은 그 어느 곳 못지 않게 청정삼림을 보유한 곳이었다.
눈을 뜨고 통나무집밖으로 몸을 내밀자 미국의 자연주의자 스콧니어링이 젊고 아름다운 그의 아내 헬렌니어링과 살던 미국 버몬트주에 있는 통나무집 아침이 연상되었다. 햇살은 오전 내내 발코니 계단에 쭈그리고 앉은 내 얼굴에 나무 그림자를 흔들며 간지럽히고 나는  어느 시인의 시를 소리내어 읽었는데, 시편들은 하나하나 눈으로 들어오고 마음 깊은 곳에도 스며들었다. 나도 한편의 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알 수 없다. 왜 나무와 시가 한 몸이 되는지?

언제부턴가/마음은 오직 편백나무 숲에 가 있지만/그보다 핑계 없는 무덤 없다고/곧 노란 산수유 이 땅을 점령한다는 기별 듣고/새벽 댓바람에 남도 행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가다가 풍경에 발목 꺾여 논둑에 벌렁 누워 쉴 때/죄의 질량문제겠지,/끝내 나는 정면으로 해를 꼬나보지는 못했다/오후가 되자 마음 조급해 걸음 엉겨 난감했으나/반듯한 국도 끝나고 지렁이 기어가는 샛길로 들자/내 입이 자꾸만 편백나무, 편백나무 노래를 했다/그 곳에 정말 편백나무 숲 있기나 한지,/있다면 이 칠흑 같은 어둠과/태양의 금빛 지느러미들이 그들을 부양했을까?/무엇 한 수 가르칠 어떤 스승도 기대하지는 않았으나/서둘러 편백나무 숲 닿기도 전에/숲은 차에 라이트와 시동을 끄도록 명령했다/빛과 소리 그치니 비로소 확연해지는 눈과 귀/느슨해진 신발 끈을 조이고/한 발 한 발 산의 늑골을 더듬기 시작한다/어둠 속에서 길을 안내하는 것 역시/어딘가 있을 편백향기뿐/걸음은 안개처럼 더디다/온 몸에 땀 아무리 흥건해도/눈물이 몸을 짊어질 수는 없는지/낮 동안 숲 사이로 유영했을 그것들도 밤 깊어지자/나무에 기대 잠든 짐승들 코고는 소리만 숲을 울릴 뿐/찾아야 할 편백 어디에 있는지 확인할 길 난감하다/너무 늦게 도착한 탓이다 그러나 혹 모르는 일/지금 어둠 속에서 목숨처럼 끌어안고 있는 이것이/내가 그렇게 찾아 헤매던 편백나무일지도

詩<편백나무는 어디에 있는가>全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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