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주성과 창의성 그리고 총체성과 의식성을 가진 사회적 존재를 가리켜 우리는 전인적 인간이라 부른다. 그런데 사람으로서 갖춰야 할 이러한 특성은 스스로 타고나거나 저절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그것은 아주 드문 경우이고, 대부분 사람은 교육을 통해 이루어지고 더욱 공고해지기 마련이다. 스스로가 세계와 자기운명의 주인이라는 깨달음을 가지고 세계를 개조하고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나갈 수 있는 지혜와 용기를 키워주는 것이 교육의 사명이라 여겨진다.
그런데 우리의 교육현실은 어떠한가.
돈이 모든 것의 주인이고 모든 것을 결정하는 사회, 곧 자본주의 체제 아래에서 살고 있다. 이른바 자본의 전지구화가 급속하게 진행된 상황에서 돈은 사람들의 모든 행위와 견해를 규정하며 심지어는 인간의 가치, 그 인격, 그 사회적 지위를 평가하는 척도가 돼버렸다. 돈만 있으면 심지어 사람까지 사고 팔 수 있다. 이러한 사회에서 교육은 모든 사람들을 자본의 제도에 복무하도록 길들이는 데 초점이 맞추어진다. 교육의 기준을 ‘유익성’ ‘효율성’에서만 찾기 때문이다. 이러한 교육을 받은 사람들이 눈앞의 이익만을 좇아가는 즉물적 경제동물이 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귀결이다. 날이 갈수록 흉포화 되어가는 청소년 범죄, 외모지상주의를 퍼트리는 매스컴과 상술에 속수무책으로 빨려들어가는 청소년들의 사고방식을 탓하기엔 기성세대의 잘못이 너무 크다. 기능인 양성 쯤을 교육으로 착각하는 우를 범하고 있고, 그런 사실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 여전히 교육정책을 입안하고 있는 한 개선의 여지는 없어 보인다.
이 땅의 청소년들은 반세기가 넘게 실용주의 교육을 받아왔다. 오늘날 각급 학교들은 ‘본능적 인간’을 양성하는 장소가 되고, 극단적 개인주의를 키워주는 마당이 되었다. 존 듀이의 실용주의 철학을 바탕으로 한 미국식 실용주의 교육 아래 자라온 청소년들이 자라서 수단 방법을 안 가리고 출세지향적 인간이 되어 이웃의 고통에도, 민족의 아픔에도 무의식 상태가 된 채로 나와 내 식구만의 안락을 위하여 무한경쟁 속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교육 문제가 나올 때마다 이른바 배웠다는 사람들이 흔히 입에 올리는 것이 루소이다. "조물주의 손에서 나올 때 모든 것은 선했지만 인간의 손 안에서 모든 것은 타락한다"라는 유명한 문장으로 시작하는 <에밀>은 루소 스스로가 자신의 저서 중에서 가장 탁월하고 중요한 것이라고 규정한 작품으로 그의 인간학으로부터 도출된 교육론 체계를 담고 있다. 한 사람이 태어나면서부터 육체적, 정신적 발달 과정에 따라 어떤 교육을 받아야 하는지를 총5부에 걸쳐 단계적으로 제시하고 있는데, 그에 의하면 좋은 교육이란 어린이를 어떤 특별한 사회적인 조건하에서 양육하는 교육이 아니라 자유로운 인간 - 따라서 모든 조건에 적합한 인간과 시민을 육성해내는 것이다. 오로지 직장을 갖기 위한 수단으로서의 교육이 아니라 인간이 되는 것을 그 사명으로 하는 자연주의적인 교육을 최고의 교육적 이상으로 삼았던 점은 오늘날 시사하는 바가 크다. 타락한 사회에서 사는 사람들은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사람과 사람 사이에는 두터운 장벽이 쳐져있다. 이 장벽을 꿰뚫고 사람답게 살 수 있는 길은 자연을 닮는 도리 밖에 없으며, 자연으로 돌아가서 마침내 ‘교육이 없는 교육’을 이루자는 것이 그의 교육론의 핵심이고 보면, 오늘날 우리 학교교육의 실상은 핵심에서 너무 벗어나 있음을 알 수 있다.
서양에 루소의 <에밀>이 있다면, 동양엔 루소와 동시대를 살았던 조선 후기의 실학자 이덕무가 쓴 <사소절 士小節>이 있다. 사람으로 이 세상에 태어나서 어떠한 마음가짐과 몸가짐으로 책을 읽고, 이웃과 화목하면서 어른을 공경하고, 사물과 현상의 이치를 깨우쳐 진리로 사람다운 사람이 될 것인가 하는 것을, 때론 자애로운 어머니처럼, 때론 엄한 아버지처럼 들려준다.
이덕무가 서른다섯 살 때 쓴 이 책은 ‘어린이 예절(동규)’  ‘여성의 예절(부의)’  ‘선비의 예절(사전)’의 3편 924장으로 되어있다. 선비와 부녀자와 아이들이 나날의 삶에서 배우고 지켜야 될 예의범절과 올바르게 닦아 나아가야 할 삶의 자세를 조목조목 적어놓은 일종의 수신 교과서이다. 이덕무가 특히 관심을 두었던 것은 사람의 본성이었다. 사람들의 심성 속에 깃들어 있는 허위의식과 탐욕을 사람의 본성이 지니고 있는 부정적 일면으로 보았다는 점에서 파스칼에 가깝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육을 통하여 선성이 계발될 수 있다고 보았다는 점에서 맹자에 가깝다.
루소와 이덕무 둘 다 평생 학교라고는 다녀본 적이 없다. 오로지 사색과 독서로 학문과 사상을 이루어 낸 사람으로 루소는 자신의 아들마저 고아원에 맡기지 않을 수 없을 만큼 가난했고, 이덕무는 왕족의 후예이긴 하지만 너무 가난해 서당 출입 한 번 못했다. 그러고 보면,  ‘공부해서 남 주나’가 아니라 ‘공부해서 남 줘야’ 진짜 공부란 것을 가르치는 것, 이것이야말로 교육이란 생각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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