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상이 온통 꽃으로 덮인 때가 엊그제 인데, 봄비 몇 번 다녀가고 나니 금세 신록이 산천에 가득하다. 해마다 되풀이 되는 산수유 매화 개나리 목련 진달래 벚꽃 배꽃 철쭉으로 이어지는 봄꽃 릴레이도 찔레꽃을 마지막 주자로 대단원의 막을 내리고 있다. 5월은 한바탕 꽃멀미를 겪고 난 뒤의 개운한 머릿속 같이 싱그러운 계절이다. 특히 봄 끄트머리와 여름 첫머리가 맞물리는 요즈음의 산하는 자연의 순리와 생명력을 호흡하기에 더없이 좋다. 
하지만 마냥 좋다고 하기엔 올봄은 너무 잔인하기도 하다. 중계방송 하듯 연일 쏟아져 나오는 전직 대통령 금품수수 보도는 국민들 가슴에 지울 수 없는 멍울을 남겼다. 시중에는 오죽 없었으면 그랬을까 하는 동정심도 적지 않지만 마지막이라 여겼던 최고 권력자의 누추한 말로를 반복해서 봐야하는 마음은 쓰리고 아릴 뿐이다. 그렇더라도 봄의 끝물, 지는 꽃을 보며 마음의 상처를 쓰다듬는 작은 여유라도 가져봄이 어떨까.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 주렴 밖에 성긴 별이 하나 둘 스러지고/ 귀촉도 울음 뒤에 머언 산이 다가서다/ 촛불을 꺼야하리 꽃이 지는데/ 꽃 지는 그림자 뜰에 어리어/ 하이얀 미닫이가 우련 붉어라/ 묻혀서 사는 이의 고운 마음을/ 아는 이 있을까 저어하노니/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

조지훈 시인의 <낙화>라는 시다. 김대중 정부 때 부통령으로 불린 박지원 씨가 검찰에 출두하면서 첫구절 ‘꽃이 지기로서니 바람을 탓하랴’를 인용해 널리 회자된 바 있는 이 시는 권력무상과 허망함을 떨어지는 꽃에 적절히 담아내고 있다. 시인은 꽃이 지는 것은 바람 탓이기 보다 때가 되면 떨어져내려야 하는 꽃의 운명 때문이라고 변호한다.  떨어지는 꽃잎으로서의 자신을 충분히 긍정하고 그 아름다움까지 노래해 보여주던 시인이 마지막에서 “꽃이 지는 아침은 울고 싶어라”고 한 심사를 오월 아침에 미루어 짐작해봄도 좋을 듯하다.
 
왜 시인들은 피는 꽃보다 떨어지는 꽃을 더 많이 노래할까? 그것은 지는 꽃이 인생의 무상함과 대자연의 순리를 깨우치게 하는 데 훨씬 적합하기 때문이다. 이백의 시 “花開昨夜雨 花落今朝風 可憐一春事 往來風雨中 :간밤에 피었던 꽃/ 아침 바람에 흩어지누나/ 아뿔사 봄날의 잔치여!/ 비바람 속에 잠깐 왔다가는 것이 인생인 것을)” 역시 인생무상을 낙화에 비유한 유명한 시다.

정치인 중에 사자성어와 시를 잘 인용하는 사람으로 둘째가라면 서러울 사람이 김종필 씨다. 그는 90년대 중반 민자당 대표에서 토사구팽 당하기 얼마 전 “앞으로 뭐 할거냐”는 기자의 물음에 “숲은 아름답고 어둡고 깊다. 나는 지켜야 할 약속이 있다. 잠들기 전에 몇 마일 더 가야 한다.”는 구절로 선문답했다. 그는 평소 미국 시인 로버트 프로스트의 시 <눈 내리는 밤 숲가에 서서>라는 시를 곧잘 애송하곤 했는데, 고함만 질러대는 정치인보다 훨씬 품격있고 여유로웠다.

요즘 신영철 대법관과 관련해 자주 인용되는 시가 있다. 바로 “가야할 때가 언제인가를/ 분명히 알고 가는 이의/ 뒷모습은 얼마나 아름다운가.”라는 구절로 잘 알려진 이형기 시인의 <낙화>라는 시다. 역시 지는 꽃의 숙명을 노래한 것이지만 인간사의 섭리로도 가슴 깊숙이 파고드는 여운이 있다. 나아갈 때와 물러설 때를 아는 사람이 귀한 세상을 우리는 살고 있다. 지금 이 순간에도 꽃은 지면서 인생의 깊은 이치를 일깨워주고 있건만 피는 꽃에만 온통 정신을 팔고 있지는 않은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5월이었으면 한다.

김우태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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