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에서 본섬의 크기가 다섯 번째로 큰 섬으로 알려진 남해군의 서쪽 최남단에 위치한 남면 홍현리, 가천 다랭이 마을은 1024번 지방도에서 만날 수 있는 그림 같은 곳으로서 설흘산(481m)과 응봉산(412m)사이 바다로 내달리는 급경사지에 아슬아슬하게 걸려 있다. 주민들은 눈앞에 끝없이 펼쳐진 바다를 포기하고 뒤쪽 산비탈 다랭이 밭에 삶을 기대고 산다. 바다가 눈앞에 있으나 배 한 척 없는 곳이 다랭이 마을이다. 앞 바다는 물살이 세고 연중 강한 바람이 불어 배를 댈 수 있는 선착장을 만들기가 어렵다고 한다. 다랭이 밭은 적게는 3평 남짓 삿갓배미부터 기껏해야 100평을 넘지 못하는 마늘밭들이 바닷가 절벽부터 설흘산 8부 능선까지 층계를 이루고 있다.

 
 
암수바위, 뒤로 설흘산 바위 능선이 보인다.
 


설흘산을 내려오면서 다랭이 마을을 들리지 않을 수는 없다. 이제 막 바다에서 떠오른 해는 가천마을 앞 바다에서 눈부시게 반짝거리는 무늬를 이루며 퍼져가고 있었다. 항촌 방향에서 마을 입구로 들어서니 마을 전체가 한 눈에 쏙 들어온다. 위에서 내려다보던 것과는 사뭇 다른 풍경이다. 경사진 곳에 다랭이 논이 물결을 이루며 안간힘으로 붙어있는 정경은 매우 이채롭다. 자칫하면 저 곳에서 밭갈이를 하던 소가 바다에 빠질 수도 있다는 말은 거짓말이 아니겠구나 싶었다.
마을 초입에서 짐을 나르는 남자들에게 암수바위가 마을 어디쯤 있는지 물었으나 어쩐 일인지 남자들은 눈도 못 맞추고 실실 웃기만 할 뿐 대답이 시원찮다. 무슨 영문인지 재차 물어보아도 무뚝뚝한 사내들은 그냥 저 아래쪽으로 가보라는 눈짓만 하니 하는 수 없었다. 차를 마을 입구에 세우고 작은 안내표지를 따라 아래로 내려가니 거기 마을이 끝나는 지점 중앙에 암수바위가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잘 생긴 숫바위라는 별칭을 증명이라도 하듯 하늘을 향해 아니 설흘산을 봉수대를 향해 미끈하게 솟아있었다. 정식 명칭은 ‘남해 가천 암수바위’지만 ‘미륵바위’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다. 남성의 양물과 임신한 여인의 배를 닮은 자연석으로 경남 민속자료 제13호로 지정되어 있다. 숫바위는 높이 5.8m에 둘레 2.5m, 암바위는 높이 3.9m에 둘레 2.3m다. 이 마을은 토속신앙들이 살아 있는 곳으로도 유명하다.
이 암수바위의 유래는 영조 27년(1751년) 이 고을의 현감 조광진의 꿈에 노인이 나타나 ‘내가 가천 어디에 묻혀 있는데 그 위를 소와 말들이 지나다녀 숨쉬기 어려우니 나를 파내어 일으켜 주면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고 했다는 것이다. 현감은 꿈에 노인이 지적한 가천의 현장에서 현재의 암수바위를 파내 세워놓고 논 다섯 마지기를 제수답으로 내주었다. 하여 매년 암수바위를 발견한 음력 10월23일에 제사를 지내고 있다한다.
아직 10월인데 암수바위 주변에 오래된 동백나무는 금방이라도 꽃망울을 터트릴 것만 같았다. 아직 피지 않은 붉은 동백, 저 직전의 삶은 얼마나 또 아름답던가.
다랭이 논의 석축을 보고 있으면 그 정교한 솜씨에 다시 한 번 놀라게 되는데 단 한 뼘이라도 땅을 늘려보겠다는 사람들의 노력은 어느 석축도 안쪽으로 들여쌓은 것이 없다. 석축뿐 아니라 원래 산이 가지고 있는 지형을 그대로 살리되 땅을 늘려 곡식 한 줌이라도 더 얻으려는 마을 사람들의 의지는 크고 작은 돌로 쌓은 석축을 보면 알 수 있다. 누가 보아도 다랭이 마을의 아름다움을 이야기할 때 자연적인 것을 그대로 안고있다는 것보다 더 큰 이유를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얼핏보면 다랭이 논밭은 산비탈에 밭을 만든 게 아니라 바다 위에 밭을 일군 듯한 인상을 주는 것도 재미라면 재미다. 

 
 
네팔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 가는 길 촘롱 마을에서 본 계단식 논
 


몇 년 전 네팔 히말라야 안나푸르나Annapurna(8091m)를 한달 간 걸을 때 내가 처음 만난 풍경 중에는 가천 다랭이 논밭을 확대해 놓은 듯한 하늘을 향해 솟아있는 계단식 논이 있었다. 설산의 빙하가 녹은 물, 마르샹디 강을 따라 걷다가 고개를 들어보면 거기 아득한 높이에 하늘을 향해 기어오르는 듯한 마을이 있고 그 마을을 따라 올라가면 눈이 모자랄 만큼 많은 계단식 논들이 있었다. 가천 다랭이 마을처럼 아기자기한 맛은 없지만 안나푸르나봉우리는 그야말로 하늘 가까운 높이여서 보고 있으면 현기증을 느낄 정도였다. 나는 다랭이 마을을 보고 네팔이나 인도의 계단식 논들의 원조는 이곳 가천 다랭이 마을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김 인 자(시인·여행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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