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 어디서나 피어있는 가을꽃들.
 

나는 밤마다 자리를 옮겨가며 노도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불면 바람이 부는 대로, 파도가 치면 파도가 치는 대로, 달이 밝으면 달이 밝아서, 혹은 산에 오르면 올라서 앵강만에 떠있는 노도를 바라보며 그 시절 김만중의 절박한 심정을 대신 헤아려보기도 하고 때로는 홀로 계시는 노모의 생신 날에도 찾아 뵐 수 없는 어머니 그리워하는 불효자식이 되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그 어떤 상상만으로도 갈증은 풀리지 않는다. 그러나 내가 본 노도는 역시 벽련마을 입구에서 본 노도가 가장 아름답다.
일전에 월포마을 김씨의 안내를 받아 배를 타고 노도를 한바퀴 돌아볼 땐 햇살이 너무 뜨거워 그토록 애틋한 느낌은 없었는데 달밤에 보는 노도는 무언가 보는 사람의 가슴을 사무치게 한다. 아니 애잔한 슬픔을 준다. 김만중은 분명 긴 달밤에 글을 쓰다말고 밖으로 나와 유배된 자신의 신세를 한숨으로 삭히고 있었으리라.
김만중이 아무리 큰 가슴을 가진 선비라 해도 저 달밤에 대나무 밭을 스치는 바람소리와 환청처럼 들렸을 갯바위에 부서지는 파도소리에 어찌 가슴이 미어지지 않았으랴. 어머니께로 돌아가리라는 희망을 포기하지 못한 채 3년의 유배생활로 그의 나이 56세에 병으로 생이 끝나가고 있다는 걸 직감했을 때 왜 탄식하지 않았으랴. ‘모두가 한바탕 꿈이었구나’라고.

 
푸른 고무마밭 뒤로 누런 가을 들판이...
 

 

 

“옛날옛날 한 옛날, 노도에는 일은 하지 않고 늘 놀면서 먹고사는 할아버지가 살았다. 그 할아버지를 가리켜 노도 사람들은 ‘노자 묵고 할배’ 혹은 ‘노자니 할배’라 불렀다. 섬 아이들에게 있어 그는 이상한 할배였다. 다른 할배들은 바닷가에 나가 고기를 잡기도 하고 밭에서 김을 메기도 하는데, 이 할배는 늘 집안에 틀어박혀 있어서 가끔 아이들은 꼴을 베다가 울타리에 몰래 숨어서 할배가 하는 짓을 지켜보았다. 어떤 날은 종일 꼼짝 않고 글을 읽었고, 어떤 날은 노자니 언덕에 올라가서 물끄러미 바다만 바라보았다.
노자 묵고 할배(김만중)가 산 곳은 노도였다. 벽작개, 큰량, 작은량이 아니라 외딴섬 노도에서 살았다. 노도는 은자가 살기에 마땅한 곳이었다.”
-박진욱의 [역사 속의 유배지 답사기] 중-

 노도의 뒷모습은 주민들이 살고 있는 앞쪽처럼 아기자기하지는 않다. 그러니 아무리 섬일지라도 역시 사람이 살을 맞대고 사는 온기 있는 풍경이 어느 자연보다 아름다울 수밖에 없다. 낮에 본 노도는 채 거두지 못한 곡식들이 바닷바람에 누렇게 익어가고 있었고 멀리 언덕에서 바라보는 노도와 벽련을 잇는 바다에는 정치망의 부표들이 어떤 상징처럼 아니 쉽게 풀 수 없는 암호처럼 떠 있었다.
 노도에는 그가 직접 팠다는 샘터와 초옥터 그리고 허묘가 남아있으나 그것이 우리나라 현대 국문학사에 길이 남을 작가에 대한 예우의 전부라면 아쉬움은 클 수밖에 없다. 이런 기분은 내가 문학을 한다는 이유도 한 몫 했겠지만, 김만중은 남해뿐 아니라 우리 문학사에 매우 중요한 작품을 남긴 인물이고 노도는 후손들에게 길이 남을 유배문학의 산실이기 때문이다.  
 <서포만필(西浦漫筆)>을 읽은 사람들은 김만중이 천문과 지리를 통달했다는 말이 헛말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것이다. <서포만필>은 김만중의 진솔한 문학관·불교관·유교관·도교관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자료로 알려지고 있다. 나는 김만중이 이야기한 ‘문학은 도(道)를 전하는 것이 아니고, 감동을 주는 것이라고 믿었다.’는 말에 전적으로 동감한다. 

 
 
항촌마을에서 가천 다랭이 마을을 들어서며, 뒤로 노도가 보인다.
 

 “백사 이공(이항복)이 북청으로 귀양을 갈 때 철령을 지나면서 ‘철령 높은 봉에 쉬어 넘는 저 구름아/고신원루(孤臣寃淚)를 비삼아 실어다가/임 계신 구중궁궐(九重宮闕)에 뿌려 볼까 하노라.’라는 시조를 지었다. 하루는 광해군이 뒤뜰에서 잔치를 하며 노는데, 이 시조를 노래하는 궁녀가 있었다. 광해군은 “처음 듣는 노래로구나. 누가 지었다더냐?”하고 물었다. 궁녀가 “장안에 널리 불려지는데 이모의 작이라고 하더이다”라고 대답하니, 광해군은 이 시조를 다시 부르게 하고 처연히 눈물을 흘렸다 한다. 시가 사람을 감동시킬 수 있다는 것이 이와 같다.”
 “광해군에게 도(道)를 역설한 이항복은 배척되었지만, 광해군을 생각하는 심정을 노래한 이 시조는 그의 마음을 움직일 수가 있었던 것이다. 김만중은 도는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없었지만, 노래는 마음을 움직이게 할 수 있음을 알았다고 할 수 있다.”
-<서포만필>중에서-

사실 김만중 개인의 사상이나 인간애 혹은 정서 등을 가늠하자면 <구운몽>이나 <사씨남정기>같은 소설보다는 <서포만필>을 권할 만하다. 제 아무리 역사의식이나 철학적 사상을 바탕에 두고 집필한 것일지라도 소설은 어디까지나 소설이고 평소 그의 됨됨이나 그가 가지고 있는 인간적 모습을 살피는 데는 서포만필이 우선이라는 생각은 변함이 없다.

 
 

다랭이마을에서 본 노도

 

/김 인 자(시인·여행가)
http://www.isibada.pe.kr / kim8646@neti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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