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색 적셔비어있는 자리에살짝 한 점만 찍으려했다아차, 젖어 있었구나울다가 말라가는종이 위에 번져버린 눈물저녁 어스름에식어가는 가슴을어둠으로라도 덮으려했다아차, 구멍이 나 있었구나찢어져 버린 어둠선혈처럼 터져나오는 울음
산 그림자 사이로 얼른얼른 비치어새끼 노루 가슴처럼 콩닥거리게 하더니수줍은 날들을 가득 채워버린아카시아 꽃같던 약국집 하얀 소녀피고 지듯, 세월은 어디론가인생을 따라 매일 떠나고내 어린 사랑은, 아카시아처럼오월, 비 젖은 향기로 돌아 오고
산벚꽃 지는 아래내내 웅크리고 있더니소쩍새 불면한지 사흘 째 되던 날망부석 같은 기다림 결연히 끝내고바위마다 입 벌리고꽃물 떠서 먹이다가저 먼저 노을이 물들자 그만참았던 울음이 터져서산 온통 적셔 버린 철쭉꽃
네 살짜리 손녀가 민들레 솜털 씨앗을 후후 불어날리고 마당을 뛰며 웃자, 들판에 엎드려 있던바람이 모두 이륙해서 민들레 씨앗을 따라 날아간다.나중에 저 아이가 커서낯설고 먼 나라 여행할 때어릴 적 날린 씨앗걸음마다 꽃피어 있기를!네 살 아이의 그날처럼웃고 있기를!
저기 통통배 하나목줄 풀어데리고 떠나고 싶다등대 그림자는 미역 말리듯 부둣가에 걸쳐두고바다 건너 간 노을 따라저기 하늘 색칠한 배줄 끌러뽀얗게 살찐 갈매기 입에다 물려서
꽃 여전히 붉은 데식은 땅에 흥건한 동백꽃버티다 놓아버린 손꽃 피는 줄도 몰랐으면서꽃 지는 자리에 앉아, 우리는제 삶이 서럽다 말하네아직 붉은 데, 지는 너를 두고
네 삶을 구태여 말하지 말아라.저기 그늘, 꽃 진 자리 보면 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