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는 코로나로 인해 잃은 것도 많지만 우리의 우수한 문화를 OTT(over-the-top media service) 방식인 넷플릭스를 통해 전 세계의 안방까지 알리게 되었다. 우리의 디지털 기술은 찬란한 오천 년 역사를 전세계에 알리는데 큰 역할을 했다. 소프트파워를 기본으로 메타버스시대 전 세계에 디지털강국의 위상을 OTT(over-the-top media service) 방식의 넷플릭스가 우리의 문화를 알리는 데 큰 역할을 했다면, 소프트파워의 원형인 지역문화를 알리기 위한 고민을 시작해야 한다. 소프트파워는 끊임없이 나오는
요즘 무더운 여름이 언제 있었냐는 듯이 아침, 저녁으로 서늘한 바람이 가을의 문턱에 성큼 와 있음을 알린다. 보름 후엔 우리 민족의 고유 명절인 추석이다.이번 추석에는 또 무슨 선물을 들고 가야 할지 고민 중이라면, 고향의 소중한 부모님과 이웃에게 안전 종합 선물세트인 ‘주택용 소방시설’ 선물을 추천해 본다.코로나19는 명절 뿐 아니라, 우리의 생활환경에도 많은 영향을 끼쳤다. 코로나의 재확산과 더불어 집중호우, 폭염 등으로 가정에 있는 시간이 많아지고, 냉·난방기 등 다양한 전기·가스 기구 사용 증가로 주택 화재의 발생 빈도가 증
망운산 맑은 물이 읍성을 감고 돌때봉천에 실려 오는 매화향기 넘실대니 매부(梅賦)는 서포 소재의 한이 서린 초혼가조선 개국 이래 가장 당파 싸움이 심했던 조선 숙종 조 정변의 회오리는 한양의 한 가운데에서 일어났지만 거기에 휘말렸던 인물들은 산간벽촌 오지와 절해고도로 내쳐졌다. 그 당시 노론의 영수였던 영의정 소재(疏齋) 이이명(李頤命) 선생은 우리 고장 남해로 유배되어 왔는데 그 적소가 남해읍성 주변의 죽산리로 추정하고 있다. 이는 소재 이이명 선생의 사후에 건립된 봉천사 묘정비 비문에 새겨진 내용에 봉천사 위치의 기록이 있고 구
지난 8월 13일은 남명초등학교가 개교 백 주년을 맞이한 뜻깊은 날이었습니다. 개교 백 년의 최초 시기는 대체로 일제 강점기 시절이어서 설립의 취지는 아무래도 정신 계몽과 민족정기를 심어준다는 차원이 아닐까 생각해 보기도 합니다. 지역적으로도 백 년의 역사를 지닌 학교가 곳곳에 있어 우리 고장 남해도 예외가 아닌 듯합니다. 그만큼 웅비찬 학습 도장으로서의 역활 못지않게 민족의 의식을 일깨워주는 데 일조를 하였다는 점에서 백 년의 의미가 더욱 빛이 나는 것 같습니다. 이러한 역사를 견지하면서도 시대 변화의 추이에 따라 지금은 예전에
한여름에 시원한 그늘을 드리우는 나무. 어떤 나무가 좋을까? 느티나무, 팽나무도 좋고 푸조나무도 좋지만, 꽃이 드문 여름에 나무 가득 연한 황색 꽃을 피우는 특별한 나무가 있다. 고현면 오곡리에서 볼 수 있는 회화나무다. 잎과 꽃이 아까시나무를 닮은 회화나무 꽃은 음력 7월쯤 핀다. 꽃잎이 떨어질 때쯤 나무 아래 앉아 있으면 꽃비도 맞을 수도 있다. 회화나무 꽃이 필 무렵 중국에서는 과거 시험이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영어 이름도 Chinese scholar tree다. 우리나라에서도 시험 준비하며 공부하는 향교나 서원에서
기왓장 한 개로도 사찰 하나 들어서고성 밑돌 한 개로도 장성을 엮는 요즘 우리의 남해읍성을 도로 묻은 불상사서포 김만중과 자암 김구를 제외한 나머지 남해에서 유배문학을 남긴 유배객들은 모두 읍성이나 성 주변이 그 적소로 전해 온 것은 역사적 사실이다. 역사적으로 존재했던 남해읍성, 유배문학의 산실인 이곳을 2008년 9월 초에 읍내의 시가지에 도로를 내다가 대규모의 남해읍성을 발견하게 되었다. 여론이 분분하였다. 천우신조로 이 세상에 빛을 보게 된 이 읍성을 대대적으로 발굴하여 문화재적 읍성의 위상을 살려 관광지로 발돋움해보자는 여
문화재야행은 우리나라 문화재를 품고 있는 전국 여러 지역에 특색있는 야간문화를 만들어가는 축제이다. 내용으로는 무형문화재 공연, 전통놀이, 역사체험, 전통음식, 전통문화, 숙박체험 등 지역문화유산을 활용한 문화재청 사업이다. 문화재야행은 문화재활용과 지역상권 활성화를 위한 목적을 가진 사업이다. 문화재청은 우리나라가 문화강국으로 한 단계 더 거듭나기 위해서는 우리문화와 역사를 활용한 사업에 중점을 두고 있다. 그리고 매 년 전국 공모사업으로 230개 지자체 중 48개 지자체를 선정해 철저한 심사 평가와 문화재야행사업을 위한 역량강화
7월 마지막 한주를 남해에서 보낸 겨우 일주일의 짧은 체류를 끝내고 이런 소회를 밝히는 게 너무 섣부르다 싶지만, 그래도 이렇게나마 사랑의 마음을 표현하지 않을 수 없다.귀농귀촌 사관학교 교육 참여 기회를 갖게 되어 찾았던 남해는 그 전에 느껴보지 못했던 새로운 감정을 촉발시켰다. 굳이 촉발이란 단어를 고른 것은 시야에 들어온 남해의 빼어난 풍광 속에서 일주일을 보내며 갖게 된 생각 때문이다. 제2의 고향, 남은 생의 보금자리, 평생을 사랑하며 살 수 있을 것 같은 첫사랑의 연심이 마구마구 솟아났다. 예전에 남해군에 왔을 때는 길어
정말 뜨거운 여름입니다. 얼마나 더운지 덥다 못해 뜨겁다고 할 정도입니다. 조금만 움직여도 땀이 비 오듯 하고, 심지어는 불어오는 바람조차도 더위를 먹어서 그런지 시원치가 않습니다. 이 더위로 자연 속의 바람마저도 그 기색이 저하될 기미를 보이는데 사람인들 오죽하겠습니까? 이 감내하기 힘든 더위를 식히기 위해 필자 역시 나무 밑 그늘을 찾아 피안의 심경을 달랩니다. 그늘 속에서 그늘이 지닌 묘미를 느끼며 명상에 잠길 즈음 구름 한 점 없는 파란 하늘을 지나던 산들바람이 필자에게 다가와 이렇게 속삭입니다. “친구야! 더위가 아무리 심
읍성의 흔적들이 손짓하고 있음에도수 백 년 읍성 밑돌 가지런히 있음에도그것을 묻어야 하는 새털 같은 무게여봉천이라는 큰 하천은 넘실대는 물결처럼 필자의 추억이 많이도 출렁거리던 곳이다. 여름 날 멱 감으며 고태기와 송사리와 가재를 잡던 일과 비가 많이 내리는 여름날이면 아버님을 따라 봉천 지류에 대발을 치고 강진바다로 향하는 참게와 뱀장어를 한 바구니씩 잡던 일을 반추해본다. 봉천이 끝나는 곳의 강진바다는 온갖 해산물과 해초가 넘쳐나는 곳이었다. 해초 사이로 자맥질해 들어가면 소라와 피조개 새조개들이 발과 손에 스친다. 빈소라 고둥
당산의 매화향기 적셔 본 분들이여그 향기 읍성 돌아 창선으로 건너갈 때 봉천과 강진 바다는 비몽사몽 흘렀네남해유배문학관 뜰에는 큰 비석이 서 있다. 높이 260cm, 폭 83cm, 두께 32.5cm로 이른바 봉천사 묘정비다. 봉천사 뜨락에 있던 봉천사 묘정비는 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으로 훼철된 것으로 보이며 봉천사 묘정비만 읍 공용터미널 맞은 편 봉강산 자락에 있다가 남해 유배문학관으로 옮겨졌다. 그 습감재 서당이 있었던 곳으로 추정되는 죽산마을 뒷산 당산에 매부를 짓게 된 매화 두 그루의 후손인 매화나무가 크나큰 매원(梅園)을 이루
조선시대에는 시대정신을 가진 유학자들이 타의에 의해 남해로 유배를 왔다면 지금은 전 세계에서 가장 바쁘게 살아가는 대한민국 워크홀릭(workaholic)들의 피난처이자 휴식처가 되어 유배를 자처하는 힐링아일랜드가 되었다. 신이 남해의 아름다운 자연을 선물했다면, 남해인들에게는 문화를 만들 수 있는 능력을 선물했다. 빼어난 자연경관과 인간이 만든 문화가 조화를 이루면서 남해는 지혜롭게 발전해오고 있다. 특히 남해로 온 유배객들은 남해의 문화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다. 대표 유배객으로는 서포 김만중 선생이 있다. 서포 김만중 선생은 유
남면 당항리 1997번지에 가면 600살이 넘은 비자나무를 만날 수 있다. 경상남도 기념물 제200호로 지정된 죽전리 비자나무다. 대밭골 비자나무를 찾아가는 길이 쉽지는 않다. 꼬불 길을 조금 돌아 들어가야 한다. ‘봉황이 알을 품는 형국’인 아름다운 죽전마을 길이다. 비자나무 아래로는 맑은 물이 흐른다. 마을 사람들이 식수로 사용했던 샘도 보인다. 지표수가 아니라 바위틈 사이로 샘솟는 암반수다. 물맛이 좋아 그런지 죽전마을은 장수하는 사람들이 많다고 한다.열매를 땅콩처럼 까먹기도 하고, 가루를 내어 먹기도 하는 나무가 있다. 생긴
寓形宇內復幾時(우형우내부기시) / 曷不委心任去留(갈불위심임거류)胡爲乎遑遑欲何之(호위호황황욕하지) / 富貴非吾願(부귀비오원)帝鄕不可期(제향불가기) 懷良辰以孤往(회량신이고왕) / 或植杖而耘耔(혹식장이운자) 登東皐以舒嘯(등동고이서소) / 臨淸流而賦詩(임청류이부시) 聊乘化以歸盡(요승화이귀진) / 樂夫天命復奚疑(낙부천명부해의) 육체가 이 세상에 얼마 동안이나 남아 있으리오 어찌 마음 가는 대로 생사를 운명에 맡기지 않으리오 어찌 이제 와 덤벙거리며 어디로 가려 하는가 부귀는 내 바라는 바 아니요, 신선의 세계도 기약할 수 없다.좋은 시절을
모두들 탄성 지른 천우신조 읍성 발견 선조가 가지런히 차곡차곡 쌓은 보물 후손이 도로 묻다니 부끄러운 보물섬 이 글의 대부분 내용은 2019년 10월 3일자 《남해시대》 신문 지상에 《읍성을 묻은 후손들이 명예를 되찾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발표된 내용과 대동소이하지만 그 이후로 지금까지 되어가는 상황이 읍성의 역사성을 가볍게 보고 관심을 가지지 않는 분위기를 직감하며 다시 한 번 올린다. 고향 양대 신문을 번갈아 가며 이렇게 읍소하는 연유가 무엇인지 다시 한 번 생각해주신다면 이미 백발성성하여 귀거래사 읊으며 고향으로 돌아갈 나이에
시대는 끊임없이 변하고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그 정도를 사람의 맨눈으로 식별하기조차 어려울 정도입니다. 이처럼 빠른 시대에 익숙해진 흔적은 이미 드러난 형(形)이나 색(色), 질감(質感)과 성질 등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금세 또 다른 신품을 기다린다는 것입니다. 물론 나날이 새로운 것이 생겨나 더욱 편하고 편리하게 이용할 수 있다면 금상첨화(錦上添花)일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새로운 것에 익숙해지기도 전에 또 다른 형이 나오기까지 그 사이에서 드러나는 조급함입니다. 이 조급함이 기다릴 줄 모르는 성격, 좀 더 차분
내가 짓는 농사, 언제 끝날까? 농사는 누가 지을 것인가? 언제까지 지을 것인가? 행정과 농협의 인력 지원은 언제까지 받을 수 있을까? 우리 농촌의 활력이 떨어지고 있다. 몸이 힘들고 아프다. 일을 할 수 없는 농촌 현실, 3년 전과 1년 전이 다르게 너무 무섭게 인력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우리 주위에 조금이나마 일을 할 수 있는 사람들, 지금 무슨 일을 하고 있는가? 요양보호사, 식당일 등 농사와는 다른 일들을 주로 하고 있다. 뜨거운 태양 아래 땀흘리며 하는 일은 인건비를 아무리 많이 준다한들 이제는 하지 않는다. 지난해에 이
읍성에 내걸었던 호롱불 깜박깜박내일을 기약 못할 숨결처럼 희미한데천고에 휘날린 시문 성벽에 걸치다소재 이이명 선생의 큰 사상과 가르침과 그 당시 부분적인 세상 판도를 적은 봉천사 묘정비가 큰 우여곡절을 겪으며 지난 2011년 12월 27일자로 봉강산 자락에서 남해유배문학관 야외공원에 옮겨졌다. 봉천사묘정비의 이전을 시작으로 매부(梅賦)의 연유문(緣由文)이 아닌 매부(梅賦)가 유배문학관에 소개되었다. 유배객들이 읍성 주변에 호롱불처럼 내걸었던 시문들은 필자를 항상 읍성 주변을 서성거리게 했다. 어릴 적 어른들이 동문안, 동문밖, 서문
코로나-19로 인해 세계를 누비던 대한민국 관광 소비자들이 국외에서 국내 관광으로 눈을 돌리면서 국내 관광시장이 활성화되었다. 뿐만 아니라 전 세계를 누비던 관광 소비자들의 눈높이가 올라가고 관광에 대한 양적 평창과 함께 질적으로도 상당한 수준에 도달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디지털강국의 장점을 살린 K-컨텐츠와 우리 전통문화를 보기 위해 수많은 외국 관광객들은 코로나가 끝나길 기다리고 있다. 이에 우리는 지속가능한 관광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확장 가능성이 높은 관광으로 발전해 나아가야 할 것이다.남해는 천혜의 자연경관으로 일 년에
봉천사 묘정비에 눈길이 머무나니당대의 역사 문화 정치 사회 문학까지 마멸을 멈추어야 할 보물섬의 서사시당대의 거목들이 유배지 남해에서 혈서처럼 써 내려간 작품들을 조명해 보고 그 시대에 어떤 고초를 겪으며 어떤 정신세계를 열어갔는가에 대한 것과 그 당시 작가들이 백성들에게 어떤 영향을 끼쳤는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을 알아보는 것은 대단히 흥미 있는 일이다. 더구나 지금 기록해 놓지 않으면 영원히 사라질 비하인드 스토리를 탐구하는 것은 역사가뿐만 아니라 그 역사가 존재했던 곳에 몸을 담고 구전과 전설을 수집하며 일부 노출된 성벽이나 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