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깨비 방천설천면 고사 마을에서 모천으로 넘어가는 길 근처에 있는 제방은 아무리 큰 비가 와도 무너지거나 헐리는 일이 없다고 한다. 그 이유는 도깨비들이 이 방천을 쌓았기 때문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이 방천에는 옛날부터 도깨비가 자주 출몰하는 바람에 해가 지면 사람들이 통행하는 것을 꺼려 꼭 다녀와야 할 일이 있으면 여럿이 함께 가거나 횃불을 준비해야 했
장전마을 앞 북서쪽에 있는 배를 엎어 놓은 모양의 작은 동산이 비자당산이다.40여 년 전만 해도 비자나무가 많았으나 지금은 거의 베어지고 몇 그루만 남아있다
▲눈썹바우(사진 있음)남해군 창선면 신흥마을에 강씨 성을 가진 총각과 진씨 성을 가진 처녀가 살고있었다. 이들은 어릴 때부터 한마을에 살면서 오누이처럼 다정하고 친하게 지냈다. 마을 사람들은 이들이 자라 나이가 차서 혼기가 되면 반드시 부부로 살게 될 것이라고 생각들을 하고, 양가의 부모들도 같은 생각으로 사돈처럼 왕래하며 지내고 있었다.그런데 세월이 흘러
대벽 왕후박나무▲단항 나갱이끝창선 사람들은 최북단에 위치한 나갱이끝에서 삼천포와 왕래하였다. 진주목에 속했던 창선현은 목장의 목마와 조세를 납부하기 위해 감목관이 배를 이용하여 삼천포까지 수송을 담당했다.어느 날 진주목사가 창선목장 감목관에게 진주목관아로 급히 오라는 지시를 내렸다. 창선 감목관은 나갱이 끝에서 배를 타려 했지만 파도가 심하여 지시를 어길수
질마산 장수바위 ▲장수바위질마산 중간 부근에 커다란 바위가 있는데 이 바위를 장수바위라고 부른다.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한 장수가 이곳에 산막을 치고 병졸을 지휘하였는데 이 바위에 기를 꽂아 놓고 앉아서 사방을 경계하면서 한참 정신없이 병졸을 지휘하던 중 현기증이 일어나 바위를 짚었다 한다. 그 후로 이 바위에는 깃발을 꽂았던 터와 장수가 앉았던 터, 손
장포리는 긴 개로 이루어져 장포라고 하는데 창선면 진동리에서 분동되었다. 이곳 장포 끝 장곶이에 동메가 있는데 이 동메를 거북산이라고 한다.이 거북산은 바다를 보고 내려가는 형국이다. 풍수설에 의하면 묫자리가 바다 물 속에 있다고 한다.
“그런 엉터리가 어디에 있어.”정성껏 제대로 엮어서 발수(길이)가 나오도록 엮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이 같이 가세에~ 나 얼른 밥 먹고 갈테니 기다려 어어.”소리 지르더니 부엌에 뛰어들어 허겁지겁 주인어른 밥상을 들고 나온다.
이 이야기는 수산리 박종포씨 조부 전기이다.하늘 높은 줄은 모르고 땅 넓은 줄만 알고 옆으로만 벌어지고 키가 작달막하여 사람들은 그를 ‘돔백이’라고 불렀다. 그는 ‘돔백이’라고
#1.율도리 마을 뒷산 암벽에 천연적으로 뚫어진 굴로 이곳의 경관이 너무 아름다워 옛날 성인들이 이곳에서 기거하였다 하여 성명굴이라 마을사람들이 불러오고 있다.전해지는 전설에 의하면 옛날 성명굴에 승려 한 분이 열심히 불경공부에 임하고 있었는데 기이하게도 이 굴의 내부에 뚫어진 새끼 손가락만한 구멍에서 쌀이 나오므로 승려는 탁발을 하지 않고도 지냈다고 한다
이 전설은 ‘한국구비문학대계’ 8집 9책에 기록된 전설로 채록자 김승찬과 김경숙은 구연자 정준탁으로부터 들은 구전을 그대로 옮겼다.남해 전설은 다른 전설이 아이고 조선 말엽에 효자범이라는 범이 한 마리 났어요. 그런데 그거는 내가 전에 우리 아버님 때에 정도 이서로 그 효자범이 생겼는데 그 효자범은 누구냐 이라믄 남해 창성(창선) 그
남해의 진산(鎭山)인 망운산(望雲山)과 이어지는 녹두산 줄기가 좌청룡의 형국이요, 지리산의 줄기인 금오산(金鰲山, 하동군 금남면) 줄기가 우백호로 가깝고도 먼 산이 겹겹이 둘러쳐 있으며 광양만과 강진바다를 앞뒤로 하고 노량 앞 남해대교 밑을 지나는 해수가 세차게 흐르고 있다.
노량해전도(3)안동 유벙어리와 일본 밀정임진왜란을 몇 해 앞두고 일본은 두 사람의 밀정을 우리나라에 보내어 나라 안을 몰래 조사해 간 일이 있었다. 이 때, 안동에 유병어리(벙어리)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그는 앞일을 잘 내다보는 사람이었다고 한다.하루는 그 집을 찾아온 두 사람의 중이 있었다.벙어리는 말을 못하므로 글로써 묻고 답하는 것이었다.이 두 손님은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전, 경북 안동 땅에 류치숙이라는 사람이 살았다. 치숙은 바보 아저씨라는 뜻으로 임진왜란 때 이순신을 전라좌수사로 천거한 류성룡 대감의 아저씨였다.
일본의 토요토미 히데요시는 조선을 칠 야심을 품고 염탐꾼을 잠입시켜 방방곡곡을 염탐하게 했다. 그런데 안동 지방에 왜놈 염탐꾼이 숨어들었다는 소문이 파다했다. 한 노인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속담에 “닭이 천이면 봉이 나오고 말이 천이면 용마가 나온다”는 말이 있다.수가 많으면 인물이 생긴다는 뜻이다. 창선에 목장을 개설한 이래 임진왜란 때는 천 필이 넘는 말을 기르는 최성기였다. 그때 많은 말 속에서 한 말이 어찌나 성질이 사납고 날쌘지 아무에게도 타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서상리 성명초등학교 안에 있던 서상 느티나무는 사택 근처에 있었다. 학교가 생기기 이전에는 논 가운데 있었는데 주위에 농업용수로 쓸 웅덩이를 파면서 한 인부가 큰 나무의 뿌리를 자르고 작업을 마쳤고, 그 인부는 아무 병도 없이 시름시름 앓다가 죽고 말았다. 주민들은 느티나무의 목신이 보복했다고 믿게 되었다.일제강점기에 학교가 들어서면서 느티나무 근처에 교장
고현면 사학산 전경▲궁지목약 200년 전 관당마을에 성품이 강직하고 성격이 온후할 뿐 아니라 성실하여 마을사람들로부터 신임과 사랑을 독차지한 ‘궁철’이라는 총각이 살았다. 그리고 규수로는 미모와 성격이 남에게 지지 않을 정도로 훌륭한 ‘지금’이라는 처녀가 살았다. 어느 날 지금이 밤중에 등을 넘어 다른 마을에 살고
옛날 힘이 장사인 한 장군이 서면 서호리 골짜기에 살면서 앞바다를 지나가는 세곡선을 부채로 부쳐 끌어들여 약탈하였다. 나라에서 군대를 풀어 장군을 잡으려 하니
(사진 2)▲선구마을 남면 선구마을옛날부터 배가 많이 드나든다고 배구미라고 불렸다. 그래서 문헌에는 선구미리(船仇味里)로 기록되다가 1895년에 마을의 전설과 부합되는선구(仙區)로 개칭되었다.마을의 전통놀이인 선구줄끗기가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26호로 지정되었다.선구줄끗기는 일제강점기 때 문화말살정책으로 사라졌다가 1978년 복원되었다.▲무지개마을 남면 홍